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공화국 (문단 편집) === 초기 === 공화정 성립 이후에도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은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였다. 이 때문에 [[라티움]][* 라티움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을 뜻한다.(지금도 이 지역을 [[라치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라티움을 현대 이탈리아어로 발음한 것이다.) 로마를 끼고 흐르는 강인 테베레 강의 북쪽을 에트루리아 지역이라고 부르고 그 남쪽이 라티움 지역이었다. 라티움 지역 밑에는 릴리스 강이 흐르는데 그 남쪽을 캄파니아 지방이라고 부른다.]에 있는 도시들은 라틴 연합을 맺은 채 대항했다. 로마는 홀로 연합군을 상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압도하였고[* 이는 도시들이 라틴 연합을 맺을 때쯤 이미 로마는 라티움의 절반 정도를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체급 자체는 이미 대등하였으나 시스템의 통일성과 효율성에 있어서 연합군은 로마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카시아눔 조약(Foedus Cassianum)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에 쓰여 있는 내용은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가 도와준다는 것인데, 따라서 로마는 단독으로 이들 라틴 연합 전체와 동등한 입지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힘이 커지자 예전에 로마를 경시하던 [[에트루리아]] 지역까지 공격하게 되었고 결국은 유능한 장군인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기원전 396년 에트루리아의 이름난 도시인 베이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베이의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텅 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귀족들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났다. 평민들은 로마 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한 다음 살게 하여 또 다른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의견에 귀족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었고 특히 전쟁을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러자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으므로 카밀루스가 무죄 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로마를 떠났다. 그래도 재판은 열렸고 [[카밀루스]]는 벌금형에 처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